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이 2세 (문단 편집) ==== 일가의 최후 ====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자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운명은 [[풍전등화]]가 된다. 원래 이들은 케렌스키 정부가 관리하고 있었고,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했으나, 케렌스키 정부가 전복되고 볼셰비키 정부가 수립되자 차르 일가에 대한 지원금을 대폭 삭감했다. 이 때문에 궁전에서부터 따라온 하인들 상당수와 이별하고, 상당수의 노동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러시아 전역에서 [[공산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반혁명군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러시아 내전]]), 독일 등 [[동맹국]] 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등 [[협상국]]까지 러시아에 군대를 파견해 내전에 개입하자 볼셰비키는 황제 일가가 반혁명군이나 외국군에게 구출될 것을 우려해 여기저기로 옮긴다. [[1918년]] 5월 최후로 도착한 곳이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예프 하우스였다. 이때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소속이었던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 포로들을 [[러시아 제국군]]이 무장시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헝 제국]]에 대한 독립군으로 조직했는데, 혁명 후에 이들은 러시아 전역을 떠돌면서 주로 볼셰비키와 싸웠다. 여담이지만 이들은 결국 1920년 볼셰비키와 협상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해로로 유럽으로 되돌아 가는데 이때 무기를 [[독립군]]에 팔고 떠났고, 이 무기로 독립군은 [[봉오동 전투]] 등의 독립투쟁을 전개하게 된다.]이 예카테린부르크를 위협하자 현지의 볼셰비키 조직은 이 일가를 처형하기로 결정하였다. 수도 모스크바의 중앙 정부는 니콜라이를 재판에 회부하려고 했으나, 당시 러시아 전역이 내전 중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모스크바로 제대로 소환할 수도 없었다.[* 모스크바-예카테린부르크는 직선거리만 3000km 가까이 된다.] [[레프 트로츠키]]를 비롯한 당시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황제 가족, 적어도 암군으로 국민들의 분노가 집중되어 있던 니콜라이 2세를 언젠가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여 사형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고 이런 의도를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볼셰비키 내에서는 민심을 반영해 니콜라이를 정식으로 재판정에 세우자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일가를 초법적으로 몰살한다는 것은 원래 계획에 없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황제 일가를 범죄적이고 비인도적으로 학살하는 것보다는 니콜라이가 초라하게 피고석에 등장하고, 트로츠키가 말빨로 피고를 압도하는 모습을 연출해 차르의 무능과 뻔뻔함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것이 정치적으로는 훨씬 효과가 있었겠지만 당시는 반혁명군에게 크게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볼셰비키가 그런 쇼도 할 수 없을 만큼 상황이 급박했다.] 본래 볼셰비키는 황제를 처형하더라도 제대로 재판을 한 뒤 처형시키려 했지만[* 일설에 따르면 [[레프 트로츠키]]가 차르 재판에서 검사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다고 한다.], 당시 내전에서 볼셰비키는 반혁명군에 연전연패하며 절대절명의 위기에 몰렸고, 사실 지방조직을 관리할 만한 행정력도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이런 처형 명령이 모스크바에 있던 볼셰비키 지도부의 결정인지, 혹은 예카테린부르크 조직의 내의 결정인지도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1918년은 볼셰비키가 반혁명군에 연전연패하며 위기에 몰렸을 때였다. 이전까지의 볼셰비키 병력(적위대)은 오합지졸의 자원병이었고, [[붉은 군대]]는 트로츠키가 국방장관을 맡은 1919년에야 제대로 조직되기 시작한다.] 다만 볼셰비키 당 내에서는 "차르 일가가 반혁명세력에 구출당할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그 일가 전부를 제거하여 반혁명 세력의 구심점이 되는 것을 차단하고, 로마노프 왕정복고는 절대 없다는 것을 전 인민에 확실히 각인시킨다"는 점은 공감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차르 부부뿐만 아니라 자녀까지 학살한 것은 인도적으로 문제될 법 했지만, 차르 본인뿐만 아니라 공주 한명이라도 반혁명세력에게 구출된다면, 여성 차르가 통치한 적이 있었던 러시아 정서상 반혁명세력의 구심점이 될 것은 확실하고, 러시아 내전에서는 공산군 및 반혁명군들은 상호 학살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게다가 이후 러시아 역사에서는 [[홀로도모르]], [[대숙청]], [[독소전쟁]]에서 이보다 훨씬 더 심한 학살극은 여러 번 벌어졌다.] 때문에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즉, 모스크바 중앙정부가 아니라 예카테린부르크 지역 소비에트가 자체 판단으로 일가 전체에 대한 사형 결정을 했더라도, 모스크바 쪽에서 묵인 혹은 사후 추인해 줬다고 할 수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Sy3NTuNig-E)]}}}||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web-cdn.magnoliasoft.net/pnp370956.jpg|width=100%]]}}}|| || 처형 직후 찍은 처형 장소 || 1918년 7월 16일 새벽 2시, [[볼셰비키]]의 보안 조직인 [[체카]] 요원들은 취침 중인 이들을 깨우며 "곧 이동할 테니 모두 행장을 갖추고 지하실로 내려오라"라고 통보했다. 가족과 시종들이 지하실로 모두 내려오고, 체카 요원들은 니콜라이 2세가 몸이 불편한 부인과 아들을 위해 요청한 의자를 가져다 주었으며 알렉산드라와 알렉세이는 의자에 앉았다. 그 직후 체카 책임자인 야코프 유롭스키(Яков Юровский)와 그의 부하들은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씨. 반혁명 세력이 당신들을 구출하려다가 실패했소. 그리고 우랄 노동자 [[소련|소비에트]]는 당신 일가에게 사형을 선고했소."라고 통보하고는 바로 총을 꺼내들어 난사했다. 니콜라이 2세가 마지막에 남긴 [[유언]]은 "뭐라고 했나? 잘 들리지 않는데…"였다.[* 유롭스키가 타고 온 [[자동차]] [[엔진]] 소리가 커서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꺼낸 질문이었다.][* 다른 의견: 빅토르 세르주가 "그럼, 우리가 다른 곳으로 이동되는 게 아니란 말이지?"라고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고 한다. 이때 차르와 함께 황후, 황녀들, 황태자, 주치의 예브게니 봇킨(Евгений Боткин)[* 예브게니 봇킨의 아들인 글레프 봇킨은 훗날 가짜 아나스타시야로 악명을 떨치는 안나 앤더슨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겸 후원자가 된다.], 황후의 시녀 안나 데미도바(Анна Демидова), 요리사 이반 하리토노프(Иван Харитонов), 하인 알렉세이 트루프(Алексей Трупп)[* 트루프는 라트비아 출신의 [[가톨릭]] 신자로 본명은 라트비아어 식인 알로이스 라우리스 트룹스(Aloizs Lauris Trūps)이다. 같이 처형된 세 사람은 황제 일가와 함께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이 되었으나 트루프는 종파가 달라서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시성되지 못했다.], 등 다른 하인들도 모두 처형되었다. 이렇게 황제 일가를 다급하게 죽인 것은 당시 황제를 지지하는 [[백군]]이 이들을 구하러 온다는 첩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별별 이야기들이 많았다. [[헤센의 알릭스|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공주들은 총에 맞아도 한동안 안 죽었다거나, [[보석]]과 장신구들을 몸에 숨겨서 [[총알]]이 튕겨졌기 때문에 한동안 살아 있어서 [[개머리판]]과 삽자루로 머리를 때려 확실히 죽였다는 등(또는 머리를 쏴서 [[확인사살]])의 이야기가 소문으로 퍼졌다. 당시 몇몇 처형인들은 "황제 일가는 전 재산을 압류당한 상황이라 몸에 걸친 비싼 보석은 전혀 없었기에, 헛소문이다."라고 일축했으나, 처형 후 시신을 살펴본 유롭스키는 공주들의 [[코르셋]]에 대량의 보석이 꿰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나중에 찾아낸 보석 전부를 모스크바 크렘린궁 관리자에게 전달했다.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처형 가담자로 1952년 사망한 표트르 예르마코프(Пётр Ермаков)는 죽기 직전 "시체를 묻기 위해 군홧발로 걷어차 시체를 굴리자,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던 공주 1명이 비명을 질렀고, 그러자 병사들이 개머리판으로 때려 죽였다."라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 다음에 시체들의 옷을 모두 벗긴 후 기름을 붓고 불태워 대충 파묻었다고 한다. 그리고 1개월 전에는 니콜라이 2세로부터 양위 받을 수도 있었던 동생 미하일 대공마저 영국인 비서와 함께 처형당했다.[* 이 두 사람의 시신은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못했다.] 처형 후 볼셰비키 측은 황제는 백군과 내통한 반혁명죄로 처형했다고 공표하였으나 황제의 가족들까지 함께 처형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처형 직후에는 황제의 가족들은 안전한 곳에 보내졌다고 발표를 했고, 이후에도 [[멘셰비키]]가 황제 일가를 죽였다는 되도 않은 거짓말을 하거나 진상을 밝히라는 요구에 그냥 모르쇠로 일관할 정도였다. 이처럼 볼셰비키 측이 황제 일가를 죽여놓고 오리발을 내민 건 무엇보다 재판도 없이 차르를 처형하고 그 일가까지 모조리 죽인 건 볼셰비키 기준으로 봐도 비합법적인 [[학살]] 행위였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측이 황제 일가를 처형한 즉시 시신을 불에 태워 유기한 걸 보면[* 무능한 통치로 국민들을 도탄에 빠뜨린 니콜라이 2세 본인에 대해서는 처형해도 된다는 여론도 있었으나 가족들에 대한 처형은 동정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볼셰비키 내에서도 합의되지 않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합리적으로 생각해도 황제 일가를 죽이는 게 아니라 추방하거나 어디 연금해두는 게 더 나았다. 당시 황태자 알렉세이는 혈우병이 도져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오늘내일 하는 상황에다 딸들은 건강하지만 계승권이 없고 망명하더라도 서방에서는 그냥 자국 국민으로 받아줄 뿐 왕족 대우를 하지 않겠다고 이미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살려두어도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지 못했다. 만약 황제 일가를 전부 처형하기로 합의가 이뤄졌다면, 굳이 공표하지 않고 숨기거나 백군이 망한 뒤에도 입다물고 있을 이유가 없다. 아나스타시야나 알렉세이의 생존 루머도 소련 정부가 황제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의 생사에 대해서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황제 일가 처형에 대한 진상이 오랫동안 어둠 속에 묻히길 바란 모양이나, 일주일 뒤 백군이 [[예카테린부르크]]를 점령하면서 황제 일가의 처형 사실은 빠르게 알려진다. 백군 점령 당시 황제 일가의 유해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으나 처형 장소가 발견되고 관련 증언까지 나오면서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게 된 것. 게다가 재판했다고 공표했으나 실제로는 재판도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니콜라이 일가가 7월 19일 학살당한 이후인 일주일 만에 예카테린부르크는 반혁명군에게 함락되었고, 이곳을 접수한 [[러시아국]] 수반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은 이들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차르 일가 학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전의 혼란의 와중에서 제대로 규명될 리 없었고, 콜차크군도 몇 달 후 이곳을 붉은 군대에 내주고 동쪽으로 도망가야 했고 니콜라이 일가가 학살당한 뒤 1년 7개월 후 콜차크는 붉은 군대에게 체포된 뒤 총살당했다.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처형을 지시한 한 사람은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먼저 강경파였던 트로츠키가 의심 받았으나 회고록에서 오히려 레닌이 명령했다는 정황을 남겼다. 트로츠키는 회고록에서 예카테린부르크가 체코 군단(반혁명군)에게 함락된 이후에, 레닌에게 차르 일가의 상황을 물었고, 레닌은 "차르 일가는 끝났다네. 모두 다."라고 짧게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이 때문에 일부 반공주의자들은 레닌이 황제 처형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한다. 또한 황제 일가를 다른 국가들과의 협상 카드로 이용하려 했다가 백군의 위협으로 상황이 급박해지자 처형에 동의했다는 설도 있다. 레닌 외에도 가장 가능성 높은 건 당시 예카테린부르크를 관할하던 우랄 소비에트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전국소비에트집행위원회 의장이었던 야코프 스베르들로프(Яков Свердлов)가 있다. 하지만 스베르들로프가 1919년 [[스페인 독감]]으로 병사해버려서 진실은 오리무중으로 넘어갔다. 다만 당시 볼셰비키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고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백군에게 구출되게 놔두느니 차라리 차르 일가를 없애는 데에는 공감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무고한 가족까지 학살한 것은 나중에 매우 비난받을 수 있는 일이지만, 이런 볼셰비키의 의도는 어쨌든 맞아 떨어져서 황제가 사라져 구심점이 없던 반혁명군은 본인이 주도권을 잡으려던 여러 군벌들의 내분 때문에 1918년을 하반기를 기점으로 급격히 세력을 상실하며 [[붉은 군대]]는 1919년부터는 공세로 전환하여 1920년에는 러시아 영내에서 대부분의 반혁명세력을 토벌하고 심지어 러시아 제국 붕괴 후 독립을 선포했던 옛 러시아 제국 영토까지 진주하여 이들을 연방에 가입시켜 1922년 소련을 건국한다. 1993년 러시아 연방의 공식 조사로는 레닌이나 트로츠키, 그리고 또 한명의 유력한 후보자인 스베들로프의 공식 명령은 없었다고 결론내렸다. 이때는 옐친 집권기라서 소련을 흑역사로 간주하고 악마화하던 시절이다. 어떻게든 소련 지도부를 악마화하려던 입장에서도 레닌이나 트로츠키의 명령은 못 찾아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문서화할 수도 없을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기도 하고, 볼셰비키 입장에서도 가족까지 처형한다는 것은 훗날 크게 욕먹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문서화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실행자들 일부는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숙청되었다. 이것은 [[대숙청]] 시절 트로츠키 파로 간주한 자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실행범들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책임자인 유롭스키는 딸이 수용소로 끌려갔지만 본인이 숙청당하지는 않았고, 1938년 60세를 일기로 죽었다. 유롭스키는 로마노프 일가를 처형한 후에도 공산당원으로서 활동하였고 처형을 맡은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니콜라이 2세를 쏜 것을 자신이라 이야기한 적도 있다.[* 다만 이후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니콜라이 2세를 쏜 것은 유롭스키가 아니라 함께 처형을 집행했던 미하일 메드베데프(Михаил Медведев)로 밝혀졌다.] 그러나 본인 아들의 이야기로는 한편으로는 자신이 로마노프 일가를 처형한 것을 평생 후회했고, 죄책감에 시달렸다는 증언 또한 남아있다. 유롭스키는 황제 일가를 처형하기 2주 전부터 황제 일가와 같이 지냈는데, 니콜라이 2세를 평범한 신사 같은 모습이었다고 회고하는 등 [[헤센의 알릭스|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를 제외한 황제 일가를 좋은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saint-petersburg.com/the-chapel-with-tombs-of-nicholas-ii-and-his-family-at-the-peter-and-paul-cathedral-in-st-petersburg.jpg|width=100%]]}}}|| 총살당한 후 그냥 [[암매장]]됐던 유해는 나중에 발견되긴 하였으나 황제 일가의 유해인지는 1998년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DNA]] 검사를 통해 신원 확인이 가능해지자 1998년 검사를 실시하여 황제 일가가 정당한 재판을 받아 처형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살해당한 수준의 불법 처형을 당한 것이 확인되었고, 사후 80년만인 [[1998년]] [[7월 17일]] 선대 [[차르|황제]]들이 안장된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성당에 일가족 모두가 안장되었으며 이들과 운명을 같이한 하인 4명도 안장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XNt_VwGaGM|옐친의 추모사 장면]]. [[2015년]] [[9월 23일]], [[러시아 정교회]]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연방수사위원회가 2007년에 발견된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유전자 감식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https://www.yna.co.kr/view/AKR2015092405855100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